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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 앙리 피렌

by puhengchi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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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 블로그는 미래의 제 아이를 기르는 올바른 방법이나, 제가 부모로써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있는 상태가 아니다 보니 아이 양육법 관련 책 몇권 읽고 나서는 흥미가 떨어져서 당분간 블로그의 방향성을 경제 및 일상에 초점에 두는 것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여튼 제가 부모로써 아이에게 반드시 가르치고 싶은것은 1. 영어 2. 요리 3. 프로그래밍 4. 역사 입니다. 이외에는 아이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영어와 요리는 일상생활에서 가르치면 되는 것이고 프로그래밍은 솔직히 여러번 배우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기 때문에 학원이나 인터넷 수강으로 대체할 생각입니다. 역사의 경우에는 수박 겉핡기 식으로 밖에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꾸준히 관련 책을 읽어 해외 여행을 갈때 설명을 해주거나 함께 책을 읽으면서 아이에게 가르칠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위한 책으로써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 대해 간략이 요약해 보겠습니다.

책 제목에 언급되는 두 인물 중 마호메트는 이슬람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랍어표기상으로 무함마드로 발음이 되기때문에 책의 제목은 마호메트이긴 하나 인물의 이름은 본래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이후로는 무함마드로 호칭하겠습니다. 샤를마뉴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멸망한 후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지역을 지배한 카롤링거 왕조 즉 프랑크왕국의 2대 왕이자 이후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인물입니다. 이 책에서 무함마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 책은 샤를마뉴에 대한 책이며, 샤를마뉴의 존재 자체가 무함마드가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는 존재라고 저자가 생각하기 때문에 두 인물의 이름이 순서대로 언급됩니다.

이 책은 1부. 이슬람 침입 이전의 서유럽 과 2부. 이슬람 카롤링거 왕조 에 대한 2부분의 설명으로 나뉩니다. 서양사의 근간이 되는 국가는 선택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아테네보다는 로마라는 것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로마 제국 최대 영토(출처 : 위키디피아)


위 사진은 기원후 117년 로마의 최대영토를 보여줍니다. 가장 눈에들어오는 특징은 로마제국의 영토가 지중해를 둘러싼 모든 지역에 걸쳐 뻗쳐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테네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온 해상국가의 전통이 로마에까지 이어져 영토의 확장이 지중해 해변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로인해 지역간 상업이 활발이 이루어졋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가 지중해인 것이며 지중해가 로마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지중해 외곽의 지역 즉 유럽으로 보면 라인강을 따라 동쪽에 위치한 지역은 로마에게 있어 야만의 지역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야만인이라고 여겼던 게르만 민족이 로마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서,동로마로 분열된 로마 중 서로마를 멸망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 민족은 이미 이전부터 로마의 문명을 동경하였기 때문에 서로마가 무너진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대신 자신들의 문화를 기존 로마문화에 흡수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따라서 제국은 무너졌으나 지중해적 통일성이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게르만족의 왕국들과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동로마제국은 서로 마찰을 일으키기는 하였으나 서로의 균형을 유지하였고 지중해를 통한 무역은 지속되었기에 과거 로마제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지중해 근방의 지역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모든것은 로마인들이 신경조차 쓰지 않던 중동 사막의 부족민들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한 이래 이슬람은 차근차근 그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영토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로마의 국경과 맞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634년 현재 요르단 지역의 트란스요르다니아를 635년에는 다마스쿠스를 공략했고, 이듬해에는 당시 로마의 동방무역의 교두보인 시리아 지역 전체를 장악합니다. 나아가 647년 혹은 638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이러한 정복은 계속되어 100년가량이 지난 750년에는 아래와 같은 영역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우마이야왕조 영토


이로써 지중해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게르만 민족과는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문명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문명을 유지하였습니다. 지중해는 남과 북으로 찢어졌고 대서양과의 통로인 지브롤터 양쪽 모두가 이슬람세력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지중해 자체였던 로마제국은 이제는 겨우 이탈리아 동부와 비잔틴제국 사이에서만 해샹교역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역 자체도 과거의 동방무역을 통해 들여오던 향신료, 파피루스, 비단등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되면서 활력이 한풀 꺽이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서 지중해를 중심으로한 경제체제는 무너지게되고 유럽의 판도는 북쪽으로 그리고 게르만인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샤를마뉴 대관식


여기에 마침표이자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바로 로마교황이 샤를마뉴를 서로마황제 임명한 것입니다. 위 지도와 같이 이탈리아 대부분의 영토는 또다른 게르만 민족인 롬바드족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교황은 계속해서 비잔틴제국에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비잔틴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저지하는 것에도 급급한 실정이었습니다. 로마교황은 비잔틴제국에서의 원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이때 마침 북쪽의 프랑크왕국에서 접근한 궁재(재상과 유사) 피핀(샤를마뉴의 아버지)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롬바드족을 견제합니다. 이러한 피핀의 유산은 아들인 샤를마뉴에게까지 이어졌으며 그는 이탈리아를 대부분수복하고 영토의 일부를 교황에게 반환하였습니다. 로마교황의 입장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두 부자는 하늘에서 내린 천사였을 것입니다. 같은 뿌리이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비잔틴제국과의 결별이 가능해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과 지중해동쪽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와 파리와 북해 및 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로 완전히 다르게 분리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유럽의 형성은 샤를마뉴가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샤를마뉴는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하지 않았더라면 서로마의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중세 유럽이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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