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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독재자가 되는 법 - 프랑크 디쾨터

by puhengchi 2021.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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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이 책은 진짜로 독재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 서술하는 책이 아니다.

8명의 독재자들이 어떠한 과정과 공통점으로 자신들의 독재통치를 시작하고 강화하였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어떠한 피해를 끼쳤는지 서술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8인의 독재자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어떠한 계기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경의를 표할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함

2. 본인에 대한 가공된 이미지를 통한 우상화 정책을 실시함

3. 공포를 통한 우상화 강화 및 반대세력 탄압

 

1번 항목의 경우 자의 혹은 시대흐름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가 있으나 2번, 3번 항목의 경우에는 독재자 본인의 의지로 시행되었다.

작가는 독재자들이 독재를 행하고 이를 뒷바침 하기 위해 우상화를 진행한 이유를 역설적으로 독재자들이란 원래 약한 존재이며 그들이 진실로 강했다면 독재자가 될 필요가 없이 다수의 선택을 받아 지도자로 선출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나서 내가 왜 그동안 열성적인 아이돌팬덤, 페미니즘, 종교에 깊이 빠진 신자들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게 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아이돌, 여성, 종교나 해당 종교의 신 또는 교주에 대한 우상화를 행하고 우상화는 그 대상에 대한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한다. 자유, 그중에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5인의 독재자 우상화 정책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 한다.

 

무솔리니

무솔리니는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개인숭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우상화의 주된 설계자가 바로 그였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을 연구했다. 저녁이 되면 개인 영사실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공연에 필요한 모든 세부적 기술을 연구했다. 

 

당시 기준으로 약 2000만 달러에 상당하는 4억 1000만 리라 이상이 신문을 통해 전국에 정권과 정권의 지도자를 홍보하는데 사용되었다. 

 

로마 진군 이후에 무솔리니는 전국을 순방하기 시작했다. -중략-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날 행사에 참가하라는 지시가 담긴 분홍색 카드가 오전에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히틀러

'말과 이미지를 통한 독일의 각성'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은 히틀러를 구원자로 묘사했다.

<한 남자가 애국심에 관한 신조를 전파하면서 무리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모든 독일인이 국민의 라디오를 통해 총통의 말을 듣는다!>라는 슬로건이 등장했고 1941년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약 65퍼센트에 달하는 가정에 라디오가 보급되었다. 하지만 라디오가 없는 사람도 구원자의 목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도시에는 곳곳에 확성기를 장착한 기둥이

세워졌고 그보다 작은 마을에는 이동식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종이와 마분지 역시 배급을 받아야 하는 품목이었지만 하인리히 호프만의 사진 사업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총통의 사진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호프만의 회사에는 매달 약 4톤에 달하는 종이가 배정되었다.

 

스탈린

수백만명의 숭배를 마지못해서 받아들인 소박한 남자의 전기를 써서 그의 이미지를 선전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중략-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프랑스 작가 앙리 바르뷔스였다. -중략- 스탈린을 찬양하는 바르뷔스의 글들은 "프라우다"에 번역되어 실렸다. -중략- 1933년 10월에 바르뷔스는 스탈린이 프랑스로 보낸 38만 5000프랑을 받았다.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3만 달러에 가까운 돈이었다.

 

스탈린스크는 위대한 지도자의 이름을 딴 다섯 개의 도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즉 스탈린스크 외에도 스탈린그라드와 스탈리나바드, 스탈리노, 스탈리나고르스키가있었다. 대공원과 공장, 철도, 운하 등도 하나같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백해에서 발트해의 레닌그라드까지 이어지는 스탈린 우하는 첫 번째 5개년 계획 기간에 죄수들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만들어졌고 1933년 개통되었다. 최고의 강철에는 스탈린나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를 둘러싼 우상화의 정점은 1940년에 그가 일흔살이 되었을 때였다. 그가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생일을 기념하는 동안 군복을 완벽하게 갖추어 입은 스탈린의 거대한 사진이 풍선에 매달린 채 붉은 광장 상공에 떠 있었고 다수의 탐조등이 이를 비추고 있었다. 이튿날에는 하나같이 <위대한 스탈린에게 영광을>이라고 적힌 현수막도 보였다. 정부는 약 200만장의 포스터에 더해서 수천장의 사진을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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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마오쩌둥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혁명가로서의 이력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에게 신화처럼 각색 된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중략- 이 책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가난한 농가에서 순전한 의지와 자존심으로 자수성가한 농부였으며 굴욕당하는 동포들을 위해 싸우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황토 동굴에 살면서 직접 재배한 담배를 피우는 소박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중략- 운명의 선택을 받아 조국을 재건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1949년 말에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중략- 베이징 하늘에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순간 자금성 정문에는 급조된 마오쩌둥 초상화가 내걸렸다. 이후로 몇개월에 걸쳐 학교와 공장, 사무실 등에 주석의 초상화가 등장했다. 보통은 초상화를 어떻게 전시해야 하는지에 관한 정확한 지침도 함께 하달되었다. -중략-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공부가 의무화되면서 사회 각계각층의 성인들은 교실로 돌아가야 했다.

 

마오쩌둥은 1958년 초에 열린 일련의 당 대회에서 경쟁자들을 굴복시키며 대약진 운동을 이용해 개인숭배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 그는 과장스러운 어조로 <숭배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라고 물었다. -중략- <각 집단은 그 집단의 지도자를 숭배해야 하며 저절로 숭배할 수 밖에 없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이야말로 <올바른 개인숭배>라고 설명했다.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은 김일성의 초상화가 평양을 장식했다. 그의 유년기가 칭송되고 비밀스러운 과거가 찬양되었다. 김일성은 미소 띤 얼굴로 인자하고 쾌활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에게 <나는 장군이 아니라 여러분의 친구다>라고 말하면서 지극히 겸혼한 처세를 보였다. 

 

위대한 지도자를 향해 아주 조금이라도 불경한 기미를 내비치면 무자비한 처벌이 뒤따랐다. 어떤 희생자는 김일성 사진이 실린 신문지로 책을 쌌다는 이유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누군가는 조악하게 제작된 포스터를 수정했다는 이유로 5년 동안 강제 노동 수용로 보내지기도 했다. 김일성 초상화를 손가락질 하며 <당신은 공연히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라고 외치며 곡물 징발에 항의한 어떤 농부는 마을에서 7년동안이나 쫓겨나 있어야 했다. 유사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희생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1956년에는 혁명 박물관이 평양에 문을 열었다. 해당 박물관에는 하나의 구역밖에 없었는데 무려 5,000제곱미터에 이르는 이 구역은 전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보여 주는 데 할애되었다. 1960년에 이르러 박물관의 규모는 두 배 이상 늘어났지만 모든 전시실을 통틀어 소련과 관련된 물품이 전시된 진열 상자는 두 개 정도에 불과했다. 이제는 <조선의 해방자>로 알려진 김일성의 동상 열두 개가 박물관 곳곳에서 방문객을 맞이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저작물을 공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로 간주되었다. 외국인들이 종종<우상화의 방>으로 묘사하기도 한 회의장이나 강의실, 전용 학습실에서는 포로와 다름없는 참가자들이 김일성의 작품을 공부하고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강제로 그의 작품을 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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